[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자비로이 부르시니”(Miserando atque eligendo)


9월 21일 목요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에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에서 묵상으로 제시한 이 표어 안에는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Jorge Mario Bergoglio, 프란치스코 교황의 본명)의 사명이 뿌리 박혀 있다. 세리를 향한 예수님의 태도를 닮고자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신을 위해서 선택한 (교황 문장의) 이 표어는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의 성무일도 독서기도에 나오는 성 베다 존자 (il venerabile, 성인의 지혜와 학문을 높이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호칭)의 강론 내용에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로마에 위치한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San Luigi dei francesi) 성당에 있는 카라바조의 대표작에서 나타난 것처럼, 교황은 성 마태오의 회심의 구체적인 방법을 자신의 강론에서 단계적으로 설명했다. 교황은 전례에서 제시한 대목(9,9-13)을 참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마태오 복음의 이 대목은 성 마태오 복음사가의 회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따르라고 그를 부르시고 선택하셨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3단계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곧 만남, 잔치, 스캔들을 통해서입니다.”.

“만남.” 우선 “예수님께서는 고을을 지나가시다가 중풍 병자를 고치십니다. 그곳을 나오시다가 아마도 성문 앞에서 세금을 받고 있는 마태오라는 세리를 보십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다”고 말합니다. 결국 마태오는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세금을 걷어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사람 중의 하나”였으며 “매국노”라고 말했다. 이어 “경멸의 대상”이었다고 덧붙였다.

교황은 마태오 복음이 전하는 바와 같이, “나를 따르라”고 부르는 “예수님의 시선을 감지하고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라고 계속 이어서 말했다. 교황은 이 만남에서 영감을 얻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반문했다. 마태오는 어떤 확신으로 주님을 따라 나섰을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강렬한 시선이었으며”, 그 시선은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말하기 위한 “진정으로 사랑 가득한, 자비 가득한 시선, 곧 자비로운 예수님의 시선”이라고 교황은 설명했다. 반면 마태오는 달랐다. “그는 의심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카라바조가 그린 것처럼 한쪽 눈으로는 하느님을 바라보고, 다른 눈은 돈 위에 고정되어 돈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한편으로는 (돈에) 고정된 시선으로, 그리고 또한 당황스럽고 언짢은 표정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시선은 “사랑스럽고 자비로우십니다.” 이 시선 앞에서 “돈의 노예가 되어 돈을 원하던 마태오의 저항은 무너졌습니다.” 사실, 복음은 마태오가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고 말한다.

이 “자비와 죄 사이의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교황은 강조했다. “예수님의 사랑이 어떻게 마태오의 마음 안으로 들어 갔을까요? 들어가기 위한 문은 무엇이었을까요? 마태오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에게서도 사랑받지 못하고 멸시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죄인임을 아는 양심이 바로 예수님의 자비의 문을 열었고,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 나섰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죄인 사이의 만남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모든 죄인들은 그분을 따라 나설 용기를 가졌습니다. 만약 죄인이라고 느끼지 못했다면 예수님을 따라 나서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구원받기 위한 우선 조건은 바로 위험에 처해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치유되기 위한 우선 조건은 바로 아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임을 느끼는 것이 이 자비의 시선을 받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너무 아름답고, 너무 좋고, 너무 자비로운 예수님의 시선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기도 중에 이 시선을 느낍니다. 이 시선은 사랑의 시선이며, 자비의 시선이며, 우리를 구원하는 시선입니다.” 교황은 우리에게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마태오는 “아마도, 복음 대목에서 찾아볼 수는 없지만, 자캐오가 했던 것처럼 기쁨에 가득찬 마음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식사초대 했을 것”이라고 교황은 말했다. “바로 ‘축제’의 순간입니다. ‘만남’ 이후에 ‘잔치’가 있었습니다. 모두 마태오의 동료들이었습니다. 모두가 동등했습니다. 곧, 마태오가 죄인이고 세리였던 친구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서 질문했을 것이고, 주님께서는 식탁에 앉아서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자캐오가 주님과의 만남과 회개를 축하하기 위해서 베풀었던 식사 때와 같이, 그들 역시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 앉아서 식사를 했습니다.” 교황은 “모두가 잔치를 즐겼다”고 강조했다. 이는 “루카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와의 만남의 잔치이고 자비의 잔치”이며 “예수님께서는 모두를 위해서 자비를 베푸신다”고 교황은 강조했다.

하지만 주님께서 “식탁에 앉았을 때”, 만남과 잔치의 다음 순간인 세 번째 순간인 “스캔들”이 시작된다. 교황은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에 함께했고”,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이것이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라고 설명했다. 교황은 “스캔들은 항상 ‘도대체 어째서?’라는 말로 시작한다”고 강조했다. “여러분이 이 말을 듣게 되면 의심하십시오. 그 말 바로 뒤에 스캔들이 따라옵니다. 옷을 찢는 것과 같은 마음의 고통을 줍니다.”  

급기야 바리사이들이 제자들에게 묻는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당신네 스승은 부정한 이들과 인사했으니 깨끗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부정한 이들과 함께 가지 말라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부정함은 병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더 더욱, 그들은 “율법에 따르면, 교리에 따르면 (…)”이라며 반복해서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교리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길로 가는 방법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랑의 첫 번째 계명을 잊어 버렸고, 희생의 새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하느님께 희생을 바칩시다. 해야할 모든 것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교황은 그렇지 않다며,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으며, 오로지 스스로를 완벽하다고 느꼈을 뿐 아니라, 자신들로부터 구원이 온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제자들에게 “어째서?” 라고 질문한다. 바로 이 “‘어째서?’라는 말은 종종 가톨릭 신자들이 자비의 사업을 목격할 때 듣곤 한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확실하십니다. ‘가서 배우십시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을 배우라고 파견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예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기를 원한다면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십시오”라고 교황은 강조했다.

물론, “누군가는 ‘신부님, 죄인임을 느끼는 것이 진정 은총입니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진실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추상적인 죄인이 아니라, 이러 이러한 구체적인 죄들로 인해서 죄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모두 많은 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죄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의 사랑 가득한 자비의 시선 안에 우리를 맡겨드립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의 묵상의 중요한 부분을 되돌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비와 죄의 만남은 잔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의 죄인이 회개하면 잔치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스캔들은 항상 많이 존재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아니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입니다. 그들에게서 멀어져야 합니다.’” “많은 성인들도 박해 받고 의심 받았습니다. 마녀로 판결되어 화형에 처해진 아르크의 성 요안나(성녀 잔 다르크)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는 성녀였습니다. 이단으로 의심받았던 성녀 데레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복자 로스미니를 생각해보십시오.”

끝으로 교황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문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다시 말해 죄인들이라는 진실을 인정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와 함께 만나는 건 가장 아름다운 것”임을 기억하면서,  “희생 제물이 아닌 자비”라는 복음 표현을 재차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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